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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장막

By 우주님 cm

1

연인이라고는 하나, 비밀 하나 없는 투명한 관계에 욕심을 내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제게 숨기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윤은 알고 있었다. 남의 속내를 읽어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만약 그 상대가 사랑하는 누군가라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대의 속을 읽어내는 일이 아주 쉬워지는 순간들도 종종 존재하는 탓이다. 로브 루치는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저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들의 이름을, 함께하는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차근차근 익혀가던 나날들의 중턱에서. 어느 순간 윤은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그가 저를 사랑하는 진심. 그가 저를 욕망하는 진심. 그리고 그가 제게 숨기고 있을 새카만 속내의 진 심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라고는 정의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상대의 속을 읽어 내는 것이 때때로 쉬운 순간들이 있기는 하다지만, 안타깝게도 신이 아닌 이상 그 속내를 알아채는 것 이상으로 낱낱이 파헤치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누군가의 까만 속내를 알아챈 이상 그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윤은 그저 눈을 깜빡이는 시체가 아닌, 살아 숨을 쉬고 직접 사고하는 지성체다. 이따금 저를 보며 능소화 향기가 난다고 중얼거리던 루치 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능소화. 능소화.... 그를 따라 작게 중얼거려본다. 윤은 그 가 제 모습과 능소화를 겹쳐본다면, 기꺼이 그의 손에 쥐여진 꽃 한송이가 되고 싶었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어느 날에, 번뜩이는 욕망에 기인한 욕심으로 저를 꺾어 손에 쥐었다 하여도 되려 제 눈을 가리고 그의 무자비함을 용인하고 싶어졌다. 로브 루치는 윤에게 있어 그런 의미였다. 저 자신을 내던져도 아깝지 않을. 득과 실을 재는 것보다 먼저 이 벅차고 간지러운 마음을 우선시하게 되는. 사랑. 연인.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의 존재. 잠에서 깬 윤은 어미새를 쫓아 나는 법 을 배우는 아기새처럼 루치를 의지했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하는 이가 제게 세상 을 가르쳐줄 누군가라 각인하는 뻐꾸기 새끼처럼, 맹목적으로 그를 따르던 나날 들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말했듯. 윤은 손목을 잡아끄는 이의 움직임에 따라 이지를 버린 채 마냥 이끌리는 시체가 될 수 없었기에. 살아 숨을 쉬고 직접 사고 하는 지성체일 수밖에 없었기에. 익숙하고 맹목적인 사랑이 찰나 사그라들고, 루치를 향한 의문이 그 몸집을 더욱 키우는 순간들도 더러 존재했을 테다.

2

기억이 돌아왔다.

기억이 돌아온 직후 윤의 모습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말했던 그날의 모습과 꽤나 닮은 구석이 있었다. 초점을 잃은 고동색 눈동자가 멍하니, 그저 멍 하니 저 너머를 응시한다. 응시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방향이 그리로 향할 뿐, 실제 윤의 머릿속에는 시선이 향한 그곳을 바라보고 있구나 하는 일련의 인식마 저 없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멍하니. 초점을 잃은 공허한 눈동자로. 어느 감정을 우선적으로 택하여 인지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때로 는 무지가 약이 된다던 누군가의 한마디를 떠올린다. 무지하기에 안주할 수 있고, 안주할 수 있기에 괴롭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라던. 이것조차 네가 내게 심어놓은 일종의 세뇌인걸까. 윤이 멍하니 고민한다. 글쎄. 누가 했던 말인지 명확히 떠오르지 않아 조금 답답한 마음이다. 이조차 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라면, 순간이 나마 바라본다. 누가 제 머리를 좀 세게 내려쳐 주었으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조차 잘 모르겠다. 무지가 약이 된다던 그럴듯한 말에는 한가지 맹점이 존재한다. 무지했던 시간들 동안. 안주했던 시간들, 괴롭지 않았던 시간들 동안 저가 감내해야 했던 기만은? 그조차 알지 못했으니 피차 상관없는 것 아니냐 말한다면, 윤은 저기 맞은편 벽에 제 머리를 갖다 박는 대신 그렇게 말하는 이의 머 리채를 움켜쥐고 대신 갖다 박아주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려면 영원히 돌아오지 말든지. 결국 이렇게 돌아올 거였다면. 이렇게 깨달을 운명이었다면 잠깐에 불과했던 그 무지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는건데. 차라리 괴롭고 말지. 배신감과 기만으로부터 보다 배로 괴로울 운명이었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맨정신으로 감내하는 것이 훨씬 나았을 거라고.

일그러진 윤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고인다. 목이 메인 듯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간단한 호흡조차 버거웠다. 죽은 듯 멍했던 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축축 히 젖어 쉴 새 없이 눈물을 머금어댔고, 흘려보내기를 끊임없이 반복해봐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윤이 흐느끼고 있다. 아니, 버거운 숨을 들이마시지도 내 쉬지도 못해 괴로워하며 통곡한다. 어떻게, 어떻게 그래 루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소리 내어 마침표를 찍지 못한 처절한 문장들이 윤의 입가 언저리에서 몇 번이고 초라한 모양으로 바스라진다. 그와 함께 산산조각나는 마음과, 찢기는듯 고통스러운 심장 부근의 통각. 배신이 가져온 결과다. 사랑의 배신은, 사랑을 품었던 이를 이렇게나 괴롭게 만든다. 더하여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무지가 그 자취를 감추는 순간. 과거의 어느 날 그랬던 것처럼 윤은 또다시 무너져버렸다. 그때 보다 더욱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낯으로 울부짖었기에, 이제는 안다. 무지는 약이 아니다. 안주한다고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하려면, 애당초 네가 나를 기만하지 말았어야 해. 아무것도 모르는 양 너를 치밀하게 꾸미고, 꽁꽁 감춰서, 내가 다시 네게 빠지는 일이 없도록 차라리 나를 밀어냈어야 해. 그때처럼 노골적으로 경멸했어야 해. 그렇게라도 해서, 이런 순간이 왔을 때 내가 주저없이 너를 증오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야 해. 이런 순간에마저 너를 떠올리는 나의 배신감만큼이나, 그 크기를 키운 사랑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산산조각 날 수 있도록. 나를 사랑하지 말았어야지 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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